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문단 편집) == 반발과 산타 안나의 축출 == 당연하게도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Coahuila y Tejas, 현 [[미국]] [[텍사스]] 주),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 두랑고(Durango) 등 여러 주에서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별도의 주 정부를 구성해 이에 맞섰다. 이 때 리오 그란데 공화국, 유카탄 공화국, [[텍사스 공화국]]이 등장했으나, 텍사스만이 산타 안나의 진압 시도를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다. 이러한 반란은 산타 안나가 행한 패배한 적들에게 행한 보복이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적어도 멕시코 내부에서는 산타 안나를 능가하는 군사지도자가 없어서 반란을 일으킨 주들은 하나씩 진압당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부유하고 보급이 잘 되는 주였던 사카테카스(Zacatecas)의 민병대는 영국제 [[브라운 베스]](Brown Bess) [[머스킷]]과 61구경 베이커 (Baker)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산타 안나의 진압군에게 1835년에 진압되었고, 그 다음 대상은 텍사스였다. 멕시코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다른 주 정부들처럼, 텍사스에서도 1835년 말에 반란을 일으켜, 1836년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3월 6일 [[알라모]]에서 전투가 벌어져 187~250명의 텍사스 방어군이 죽고, 3월 27일에는 골리아드 학살(Goliad massacre)이 발생해 342명 이상의 텍사스 군과 그 지휘관인 제임스 워커 패닌(James Walker Fannin)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알라모 전투로 인해 샘 휴스턴(Sam Houston) 장군이 시간을 벌었고, 4월 21일 산 하신토(San Jacinto) 전투에서 산타 안나 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 날에 산타 안나를 포로로 붙잡았다. 산타 안나는 [[용기병]] 사병의 복장을 입고 늪에 숨어있다가 잡혔다.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대행인 데이비드 G. 버넷(David G. Burnet)과 산타 안나는 벨라스코 협정을 조인하여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그 조건으로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멕시코 시티에서는 다시 부스타만테가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으므로 멕시코 정부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텍사스 공화국]]과 [[미국]]이 합병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은 멈추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